소소(笑疏)육아/소소시담5 [소소시담] 박재삼 - 수정가 수정가 -박재삼 집을 치면 정화수 잔잔한 위에 아침마다 새로 생기는 물방울의 선선한 우물집이었을레. 또한 윤이 나는 마루의, 그 끝에 평상의, 갈앉은 뜨락의, 물냄새 창창한 그런 집이었을레. 서방님은 바람 같단들 어느 때고 바람은 어려 올 따름, 그 옆에 순순(順順)한 스러지는 물방울의 찬란한 춘향이 마음이 아니었을레. 하루에 몇 번쯤 푸른 산 언덕들을 눈 아래 보았을까나. 그러면 그 때마다 일렁여 오는 푸른 그리움에 어울려 흐느껴 물살짓는 어깨가 얼마쯤 하였을까나. 진실로, 우리가 받들 산신령은 그 어디 있을까마는 산과 언덕들의 만 리 같은 물살을 굽어보는, 춘향은 바람에 어울린 수정빛 임자가 아니었을까나. © mauveine, 출처 Unsplash 이 시는 고등학교 때 문제집에서 처음 읽고 아직까지도.. 2020. 8. 12. [소소시담] 이정록 - 의자 의자 -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,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아이를 낳기 전에는 첫째와 셋째가 일찍 잠든 밤, 늦은 오후 낮잠을 자서 늦게 잘 게 뻔한 둘째딸에게 인심 쓰듯 “읽고 싶은 책 들고 오세요.” 하니 책을 한가득 들고 왔다. 무릎에 앉히고 한 권씩 책을 읽어주는데 훌쩍 키가 자란 아이의 머리가 내 눈을 가리기 시.. 2020. 8. 12. [소소시담] 정호승 - 아기의 손톱을 깎으며 아기의 손톱을 깎으며 -정호승 잠든 아기의 손톱을 깎으며 창 밖에 내리는 함박눈을 바라본다 별들도 젖어서 눈송이로 내리고 아기의 손등 위로 내 입술을 포개어 나는 깎여져 나간 아기의 눈송이같이 아름다운손톱시 된다. 아가야 창 밖에 함박눈 내리는 날 나는 언제나 누군가를 기다린다 흘러간 일에는 마음을 묶지 말고 불행을 사랑하는 일은 참으로 중요했다 날마다 내 작은 불행으로 남을 괴롭히지는 않아야 했다. 서로 사랑하기 위하여 태어난 사람들이 서로 고요한 용기로써 사랑하지 못하는 오늘밤에는 아가야 숨은 저녁해의 긴 그림자를 이끌고 예수가 눈 내리는 미아리고개를 넘어간다. 아가야 내 모든 사랑의 마지막 앞에서 너의 자유로운 삶의 손톱을 깎으며 가난한 아버지의 추억을 주지 못하고 아버지가 된 것을 가장 먼저 슬퍼.. 2020. 8. 12. [소소시담] 최영미 시인 - 사는 이유 사는 이유 -최영미 투명한 것은 날 취하게 한다 시가 그렇고 술이 그렇고 아가의 뒤뚱한 걸음마가 어제 만난 그의 지친 얼굴이 지하철을 접수한 여중생들의 깔깔웃음이 생각나면 구길 수 있는 흰 종이가 창밖의 비가 그렇고 빗소리를 죽이는 강아지의 컹컹거림이 매일 되풀이되는 어머니의 넋두리가 그렇다 누군가와 싸울 때마다 난 투명해진다 치열하게 비어가며 투명해진다 아직 건재하다는 증명 아직 진통할 수 있다는 증명 아직 살아 있다는 무엇 투명한 것끼리 투명하게 싸운 날은 아무리 마셔도 술이 오르지 않는다 이 시는 '서른, 잔치는 끝났다'라는 시로 유명한 최 영미 시인의 작품이다. 시인이 말하는 사는 이유 중 여러 가지가 내가 사는 이유와 참 비슷하다. 시, 아가, 종이, 비, 어머니. 시인과 나 뿐만 아니라 사람 .. 2020. 8. 12. 이전 1 2 다음